Lee S.G. 2021. 1. 12. 11:12

단편 소설 <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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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치를 벗어나기 위해 반복된 힘겨운 몸부림은 날개가 모두 빠져 나오자 미세한 떨림만이 있다. 나와 정훈은 나비의 탄생에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왠지 그럴수가 없었다. 우리의 감정을 표현하기에 지금 눈앞의 상황은 어쩐지 경건하게 숙연해졌다. 생명이 '신비롭다'는 말로 대체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내가 아는 어떤 단어로도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우리의 나비를 품었던 고치는 얇고 투명한 막으로 이제 빈껍데기만 남겨졌다. 나비는 성충이 되기 위해 번데기 속에서 휴면기를 갖는다. 그 이전에는 꼼지락거리던 녹색의 유충으로 표면에는 자잘한 솜털이 났고 각 마디엔 여러 쌍의 다리가 달려있다. 지금에서야 고백하건데 나는 다리가 많은 곤충은 정말 질색이다. 한번은 정훈이 확대경으로 유충을 보면서 미소를 짓고 "귀여워"라 말하며 내게 볼 것을 권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정말이지 소름 돋을 정도로 끔찍한 기분이었다. 그때의 짧은 순간은 찰나와도 같았지만 이따금 기억속에서 불현듯 떠올라 그때의 기분을 상기시킨다.

- 봐, 날개가 조금씩 펼쳐지고 있어!!

정훈의 말처럼 말려있던 날개가 점차 펴지고 있었다. 꽃이 개화할 때와 같이 뚜렷한 윤곽을 잡아가고, 두 쌍의 넓은 날개엔 선명한 무늬가 잡혀 화려한 빛을 띠어 간다. 그물망과 같은 무늬가 일정한 간격으로 그려져 있고 선 밖으로 색이 번져 나오는 착각을 일으킨다. 날개 위쪽엔 뾰족한 돌기 같은 것이 나 있다. 이를테면 박쥐의 발가락 같은... 그리고 우리의 나비가 다른 종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한 쪽 날개 끝 부분이 테를 두른 짙은 검정색이라는 것과 그쪽만이 오돌토돌한 톱니와도 같다는 것이다. 순간이었지만 '지킬박사와 하이드' 또는 '아수라 백작'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피식 거렸다.

정훈은 나와는 다르게 제법 진지한 표정이 돼 "특이한 '종' 인가봐."라며 뭔가 고민하는 표정이 되었다. 난 방금 전의 생각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아니면 돌연변이겠지."하고 웃었다.

- 돌연변이 일리가 없어. 의외로 발견되지 않은 생물이 많으니까 분명 신종(新種)일지도 몰라.

우린 새로운 종을 얘기할 때가 많지만, 사실은 원형 즉 기본이 되는 종에서 가지를 뻗어 가듯 여러 변이를 거쳐 새로운 종으로 거듭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돌연변이나 신종이나.'란 생각이 스쳤고, 정훈인 무슨 생각인지 몰라도 종전과는 다르게 밝은 표정이 되었다. '저 녀석의 변덕을 누가 알겠어.'라던 생각도 잠시, 정훈은 유리관안의 나비를 골몰히 바라보며,

- 표본하자.

이 말이 어째서 꺼림칙한지. 동물을 박제시키는 것도 아닌, 고작 작은 곤충 하나의 표본일 뿐인데 기분이 별로다.

- 신종일지도 모른다면서, 표본을 하자니...

- 이걸로 우리 점수나 따자!

- 다른 나비를 표본하고, 이건 좀 더 지켜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

내말의 어조는 평소와 다름 없었을텐데, "Relax"하는 정훈의 말. 오히려 상기된 표정을 짓고 있는 정훈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난 침대 위에 던져둔 가방을 집어 맸다. 그리고 "이만 갈게."란 내 말에, 정훈이 "벌써 가려고?"라는 말로 붙드는 시늉만 할 뿐 나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런 녀석을 향해,

- 나 몰래 혼자 표본하지 말고, 함께 하자.

내 말에 "그래."하며 웃음 짓는 정훈을 뒤로하고 집밖으로 나왔다. 제법 차가운 바람이 분다. 요즘의 날씨는 변덕이 심하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늦봄인데, 가을 바람처럼 차고 건조하다. 게다가 여섯시가 겨우 넘은 시각인데 어둑어둑한 것이 비라도 내릴 것 같다. 하지만 비 특유의 습하고 냉한 기운이 전혀 없다. 평소보다 빨라진 걸음걸이에 기분이 묘했다.

눈부신 태양이 작열하는 오후, 가족과 함께 인근의 공원으로 나들이를 갔다. 작년에 완공된 공원은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었고, 봄과 여름의 경계인 이맘때가 되면 공원은 인파로 가득하다. 형과 공놀이를 하던 중, 공이 길게 수평으로 날아 수풀 사이로 사라졌다. 귀찮게 시리.. 공 주워와 라며 형의 명령조에 툴툴거리며 수풀로 공을 찾으러 뛰어 들어갔다. 잔디가 깔린 곳과는 불과 10미터도 안되는 거리인데, 빛이 스미지 않고 풀은 크고 길었으며 습한 이끼향이 코끝을 파고든다. 내가 손을 몇 번 내젓지 않고도 공의 위치를 확인 할 수 있었던 것은, 초록의 숲에서 하얀 공은 제법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멀리 굴러갈만큼 평평한 지대도 아녔다. 난 표면이 젖은 공을 잡아 들었다. 그때 주위에 푸득거리는 물체가 시선을 잡아끈다. 커다란 점박이 몸뚱이에 넓고 검은 그물의 날개로 공간을 휘젓고 다니는... 나비. 앵두 열매 크기만큼 큰 머리에는 가시 같은 더듬이가 돋아있고, 그 끝엔 꿈틀거리는 버러지들. 열 세 개의 다리에는 솜털이 무성하게 자라나 그 사이사이에선 악취가 나고 누런 진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평소라면 이맛살부터 구겨졌을텐데, 마음과 다르게 난 녀석을 잡기 위해 펄쩍펄쩍 뛰었다. 입가엔 행복한 미소를 달고 '이리와~ 내가 너의 친구가 돼 줄게'라는 말을 하며,

늦잠을 잔 덕에, 오전 선행 학습 시간에 간신히 등교했다. 몇몇 빈자리가 눈에 띠었고, 평소 나보다 일찍 오던 정훈이 안 보인다. 그래서 가끔이긴 하지만 같이 등교하던 앞에 앉는 경민에게 "정훈이 아직이야?"하고 묻자, 모르겠다며 고개를 절래 저어댄다. 순간 어제 일이 떠올라 '늦게까지 표본을 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하자고 말을 했지만, 솔직히 직접 그 일에 가담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인지 내심 편안해졌다. 이후 영어 독해를 하던 중, 막히는 단어가 있어 사전을 꺼냈다. 내 또래 중 다수가 전자사전을 이용하고 있었는데, 나는 여전히 두툼한 사전을 가지고 다닌다. 고3 형에게 물려 받은 양장표지 사전이다. 어머니께선 전자사전이 두개씩이나 있을 필요가 없다며, 형 졸업 후에 물려받으란 말로 내 요구는 묵살돼 그 덕에 가방이 무겁다.

- m.. e. t. a. m. o. r. p.

찾으려던 단어 아래, 깨알같은 글씨로 '나비 : 두 쌍의 넓적한 날개가 있는데, 곁에 분가루가 많고 갖가지 무늬가 있다. 나방과 달리 앉아 있을 때에는 날개를 접어서 등 위로 곧추세우며 낮에만 활동한다. 꽃의 꿀을 빨아 먹고 사는데, 애벌레는 채소 따위에 해를 끼친다. 전 세계에 약 2만여 종, 우리나라에 약 24여 종이 있다. 동의어 호접(胡蝶)'이라는 긴 문구가 적혀 있는 작은 포스트잇이 불어있고 뒷면에 '나비의 분가루는 환각, 몽환의 체험... 하지만' 뒷말이 없다. '하지만?' 대체 무슨 내용이었을지 궁금해졌지만, 언젠가의 일처럼 귀찮아져 단어만 체크했다.

metamorphose : 변태시키다

1교시가 시작할 무렵 정훈이 들어왔고, 안색이 안 좋다. 이런 날은 으레 습관처럼 교실 뒤 창문을 열어두는 버릇이 있는데 본인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런 그가 곧바로 자신의 자리로 가서 가방을 벗어 책상위에 올리고 난 뒤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은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평범한 행동이었다. 그래서 곁으로 다가가 아는 척을 했다.

- 선행 학습 시간 땡땡이나 치고, 어쩌다 늦은 거냐?

날 올려다본 정훈의 표정에 꺼림칙한 기색이 역력했다. 내 추측이 들어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왠지 들뜬 기분이 되었다. 그러다 난 아는 척을 해댔다.

- 그런 표정 짓지 않아도 돼. 예상 하고 있어. 역시 그랬을거란걸. 왠지 내가 가고나면 혼자서 표본을 할 것 같더라니, 다 이해하니까 그런 애매하게 미안한 표정 짓지 않아도 돼.

난 아쉬운 척 거짓말을 하며 정훈의 등을 토닥였다. 정훈은 나를 올려다보던 시선을 거두고,

- 그게 아냐... 나혼자 표본했을리가 없잖아.

순간이었지만 정훈의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되었다.

- 아... 그랬구나. 난 또 뭐라고, 네 표정 때문에 오해했잖아. 꼭 내게 잘못이라도 한 것 같이. 도대체 뭐가 그렇게 심각한 거야?

정훈은 긴 한숨을 내쉬고 난 뒤,

- 실은, 어제 엄마가 너 가고 난 뒤 심부름을 시키셔서 방을 잠시 비웠어. 그 사이 영훈이 놈이 들어갔었대. 우리가 채집해 놓은거 가족이 보는게 싫어서 늘 방문을 잠그고 다녔거든. 금방 다녀올거란 생각이 급해서... 후... 다른 채집함의 곤충들은 모두 그대로인데, 어제 탈피한 나비를 담아둔 유리관을 영훈이가 열어 봤대. 녀석이 방에 들어와서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나비가 유리관 내벽에 여러번 돌진하더니 픽하고 바닥에 쓰러졌대. 지딴엔 걱정이 돼 앞뒤 생각않고 열어 봤다는데, 정말 황당하게 나비가 몇 번 날개를 파닥이더니 날아가 버렸대잖아. 그러니까... 의도적 행위처럼, 유리관을 나와 창밖으로 날아갔대. 넌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난 영훈이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서 추궁도 하고 혼내줬는데, 절대 아니라는 거야. 하! 씨! 내 말이 믿기지 않겠지만, 나 너무 어이없고, 게다가 이래저래 너한테도 미안해져서..

난 정훈의 말이 거짓이든 사실이던 상관이 없었다. 그 나비가 사라져서 더이상 표본에 대한 끔찍한 상상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이상하리만치 안심이 되었다. 고민의 흔적도 없이.

- 네 말 믿으니까, 미안할 것 없어.

내 대답에 오히려 정훈이 얹짢다는 듯 눈살을 찡그렸다.

- 정말 괜찮은거야? 내 말을 믿는거냐고!

방금 전까지만해도 미안해하던 정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날카로운 시선을 내게 보내고 있었다. 불쾌감과 불안함이 내 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게다가 정훈은 어딘지 이상해 보인다. 말을하지 않았지만, 잃어버린(?) 나비에 대한 병적인 집착 같은 것이 느껴진다.



- 마침 -